산업 관리: 산업경영의 발전방향 동시철학
미드베일 철강 회사의 부주임인 프레드릭 윈슬로 테일러는 1880년대에 노동자들이 불필요한 동작을 사용하여 기계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작업하는지를 결정하기 위한 일련의 연구를 수행했다. 기사나 부품을 출력하기 위해 필요한 각각의 연산은 세밀하게 분석되고 연구되었으며, 불필요한 운동은 제거되었다. 작업별 작업실적에 대한 기록이 보관되고 기준이 채택되었다. 초기 연구로 작업 속도가 빨라지고 휴식기가 도입됐다.
산업 경영에는 사람뿐만 아니라 기계의 성능도 연구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기계의 작동 상태를 양호하게 유지하고 생산 품질을 보장하기 위해 고용된다. 공장을 통한 자재 흐름은 작업자나 기계 어느 쪽도 유휴 상태가 되지 않도록 감독됩니다. 출력을 표준에 맞게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인 검사가 이루어집니다. 차트는 작업자와 기계의 성과를 기록하고 확립된 표준과 비교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각 수술의 비용을 세심하게 계산한다. 새로운 물품을 제조할 때 기계 생산에 적합하도록 설계가 주어지고, 사용할 기계와 재료를 포함하여 제조의 각 단계가 계획된다.
과학적 경영의 원칙은 사무, 자금 조달, 마케팅을 포함한 모든 산업 분야로 점차 확장되어 왔습니다. 1910년 이후 곧 미국 기업들은 최초의 인사 부서를 설립했고, 결국 몇몇 대기업들은 노동 효율성에 도움이 되는 환경을 만드는 데 앞장섰다. 안전장치, 위생시설 개선, 플랜트 카페테리아, 휴식 및 레크리에이션 시설 등이 마련돼 직원들의 복지를 높이고 사기를 높였다. 이러한 많은 개선은 직원 단체, 특히 노동조합의 주장으로 이루어졌다.
몇 년 동안, 노동자들과 그들의 노조들은 또한 더 높은 임금과 단체 건강 및 생명 보험과 자유 퇴직 연금과 같은 증가된 복리후생을 추구했고 종종 얻었다. 그러나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많은 미국 사업체들의 감축과 축소는 이러한 혜택의 상당수를 상당히 감소시켰다. 일부 기업은 직원들이 주식을 매입하는 것을 허용하고, 다른 기업은 이사회나 상점 고충처리위원회에 직원을 대표하도록 규정한다. 많은 법인이 승진을 염원하는 근로자에게 특별한 연수·승진 기회를 제공하고 있으며, 고용안정, 연봉보장 등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기업도 있다.
동시철학
인간은 존재 일반의 단순한 일부에 불과하지만 존재 일반도 인간에 의해서만 밝혀질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존재의 목동이라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그러나 그 목동도 그 언어 없이는 그가 할 일을 다할 수 없다. 그래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것이다 존재도 인간 아니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에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존재는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한 의식되었다 할 수 없고 의식되지 않은 존재는 암흑 속에 갇혀 있다고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정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서 인간존재 즉 다자인의 분석이 중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후기저서에서 하이데거는 차츰 언어에 앞서 존재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존재 자체는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왜냐하면 과학적 설명은 존재를 인과에 의해 지배되는 물질로 보고 있는데 존재 자체는 물질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된 수 없다는 것이다. 과학적 사고에 비해서 철학적 사고는 더 고차적인 입장에 있다. 그러나 철학적 사고는 논리나 이성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역시 개념에 의한 사고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는 개념 이상의 것 개념으로 포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논리와 이성을 초월한 사고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참다운 철학적 사고는 서양의 철학적 전통과는 반대로 시적 사고여야 한다고 믿는다. 오직 시만이 철학과 그리고 철학적 사고와 같은 동일한 차원에 있다. 오직 시적 차원에서만 우리는 사고는 상식, 편견에서 해방되어 있는 그대로의 존재에 충실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도 이때 사고는 능동적으로 존재를 설명하고나 드러내려 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존재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게 마련이다. 이와 같은 시적 태도로써 사고는 존재의 목소리를 경청하면서 존재의 진리가 표현될 수 있는 낱말을 찾는다.
하이데거는 주장하기를 우리는 존재를 우리의 사고력으로 파헤치려할 것이 아니라 존재의 열림을 기다리는 진짜 사고가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에 의하면 어떤 철학적 저서보다도 훌륭한 시, 가령 횔덜린의 귀향 같은 작품이나 반 고흐의 그림 같은 작품이 보다 충실히 존재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하이데거의 철학은 이미 철학이 아니고 일종의 시나 주문에 가깝고 하이데거는 철학자이기보다는 주술적 혹은 신비주의적 신비주의자나 신학자에 가깝다. 우리는 그의 말들에 무한한 매력과 황홀감까지 느낄지 모르나 그것들은 이미 이성으로서는 이해될 수 없는 지점에 이른다.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차츰 시가 더 중요시되고, 존재는 오로지 시적 표현으로만 표현될 수 있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존재가 열린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첫 번째의 이유를 생각해보자 존재는 그냥 있는 것이지 의식된 것도 아니며 의미화된 것도 아니다. 존재가 의식되려면 그것은 반드시 언어로만 표현된다. 왜냐하면 존재는 반드시 무엇무엇이라는 개념 속에 넣어졌을 때 의식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언어를 떠난 개념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적 언어나 철학적 언어나 시적 언어를 막론하고 모든 언어는 개념적인 언어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언어로 의식된 존재는 존재 자체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하지만 시적언어는 그 밖의 언어보다 덜 개념적이다. 다시 말해서 시적 언어의 의미는 과학이나 철학의 언어의 의미보다 더 애매하고 막연하다. 따라서 존재가 시적 표현을 갖게 될 때 그 표현은 다른 표현보다도 충실한 것이라고 주장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논리가 하이데거의 시어에 대한 이론의 뒷받침이 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점에서 언어에 대한 하이데거의 생각은 노장사상이나 선불교에 나타난 언어에 대한 관점과 퍽 유사하다. 하이데거가 선불교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나 그의 철학이 동양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이유도 여기서 이해된다.
그러나 시적 언어가 존재를 가장 잘 서술할 수 있다는 하이데거의 주장은 언어의 본질에 대한 그의 착각에서 생긴 것으로 믿어진다. 어떤 존재를 그리는 언어가 언어일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조건은 거 언어가 존재와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 즉 존재와 다르다는 것이다. 만약 언어가 그것이 표현다호가 하는 존재와 다르지 않다면 그 언어는 아무것도 의미 할 수 없는 언어 즉 언어 아닌 언어 끝나게 된다. 어떤 언어도 그것이 표현하는 존재와 같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같아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한 언어가 다른 언어보다 존재에 더 가깝다거나 멀다고 따질 수 없다. 한언어가 다른 언어보다도 더 좋다고 하는 이유는 그 언어가 존재와 더 비슷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언어가 어떤 특정한 요구를 보다 더 잘 채워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요에 때라 과학적 표현이 시적 표현보다 좋다고 할 수 있고 시적 표현보다 과학적 서술이 더 좋다고 판정할 수 있다. 한 언어의 선택은 존재에 더 가까우냐 아니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상황에서 더 적절한가 아닌가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와 같이 볼 대 시가 과학보다 참된 존재를 보다 잘 보여준다는 하이데거의 주장에 잘못이 있음을 알게 된다.
둘째 우리가 존재를 알려고 덤벼들지 말고 오히려 존재가 스스로 열려서 계시되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하이데거의 주장을 검토하자.
만약 위와 같은 주장이 무엇인가를 의학하고 표현할 수 있는 인간은 우주 즉 조재 일반의 일부에 불과하니까 인가의 의식현상도 우주현상의 일부에 지나지 않음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만일 하이데거가 존재 일반 즉 우리가 막연히 우주라고 부르는 것을 한의 인격적인 것으로 본 나머지 그런 존재가 마치 극장의 막을 열거나 극장에서 불을 켜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러한 생각은 아무 근거도 없는 표현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하이데거의 주장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그것의 진위를 가려낼 수 없기 때문이다. 진위가 가려질 수 없는 주장은 주장이 아니라 일종의 주문일 뿐이다.
하이데거 철학의 근본적인 문제는 앞서 말했던 대로 존재 일반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를 밝혀보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가 언어로 표현되지 못함은 자명하다. 왜냐하면 언어는 한 존재가 다른 존재와 구별되었을 때만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존재 일반 즉 총괄적인 존재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음을 함의한다. 그러므로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 일반은 과학적인 문제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철학적 문제, 그리고 어떠한 종류의 문제도 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하이데거가 제기한 문제는 존재와 언어와의 관계를 오해한 데서 생긴 사이비의 문제라고 단정하고 싶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하이데거의 이른바 근원적 존재학이 몇몇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시인들의 상상력을 크게 해주었을는지는 모르나 그 이후의 실존주의자들에게도 거의 망각된 이유가 된다.
하이데거에 대한 이와 같은 평가는 결코 그의 철학적 공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존재학을 떼어 버리고 나라도 그의 인간한 즉 다자인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은 인간존재에 대한 새롭고 깊은 철학적 이해를 갖게 했고 과학적 지식과 현대기계문명에 대해 반성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철학은 근본적으로 윤리적이다. 인간은 진정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근본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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